욥기 11장-12장 – 소발, 하나님의 오묘함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말하다 (욥 11:1-12:25)


소발이 말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오묘하고, 하나님의 지식은 광대하다(11:6). 하나님은 무한하며 인간이 능히 측량하여 알 수가 없다(11:7). 인간은 미련하며, 어리석고, 분별력이 없으며, 우둔하다(11:6,11,12). 스스로 자신이 어떠한 죄를 범했는지 인간은 알지 못하고(11:6), 자신의 헛됨과 미련함을 깨닫지 못한다(11:12). 그러니 욥의 주장은 다만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며, 그의 많은 말은 다만 그의 부끄러움일 뿐이다(11:2,3).


욥이 대답한다. 너희만 지혜자라는 말이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12:2). 평안한 너희는 재앙을 당한 자를 비웃고 있지만, 재앙은 너희 곁에도 와 있음을 알아야 한다(12:5).


욥은 12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려내고, 13장에서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친구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14장에서 다시금 하나님께 호소하며 기도한다.


사람의 무지와 하나님의 오묘함에 대한 소발의 진단에 대해 욥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들이대며 소발의 진단이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결과임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의와 의로운 통치를 변호하려는 친구들은 그로 인해 현실의 냉혹함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의가 겨우 구제된다면 그건 아이들을 위한 동화일 뿐이다.


욥에 따르면 강도의 장막이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오히려 평안을 누리는 것, 그것이 현실이다(12:6). 자연 만물을 보면 약육강식이 지배한다. 순진함이 지혜가 아니며, 강포한 짐승이 그보다 약한 짐승을 잡아 먹는다(12:7). 의로운 짐승이 번성하고, 악한 짐승이 망하는 그런 일은 자연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모두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결국 이런 냉혹한 현실이 비롯된 근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12:6,9).


하나님의 손에서 이 모든 일들이 나온다. 냉혹한 현실보다 그 모두가 비롯되는 근원이 하나님의 손이라는 생각이 욥을 고통스럽게 한다. 랍비 쿠쉬너와 같이 하나님의 전능을 포기하면 현실 세계에서 보여지는 불의와 폭력은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비난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냉혹한 현실을 동화로 만들고 하나님의 의를 지켜내든지, 아니면 현실이 전부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든지 양자택일 만이 남겨진 듯 느껴진다. 


소발의 말처럼 현실은 사람의 지혜와 판단과 소망을 넘어서 있다(12:17-21). 하나님의 길을 측량하고 따라가기에 버거운 것이 맞다. 그러나 그 이유는 사람이 미련하고 지혜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하듯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어 그들은 모든 일들이 사람의 논리와 기대를 넘어서서 일어나고 있음을 이해한다(12:12). 그러나 그가 이해하는 것은 일어나는 일들 배후에 놓인 정의의 원리가 아니라, 따라갈 수 없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현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깨달음이다. 문제는 인간의 무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의 거침없음이다(12:14,15,17,23).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하나님에게 속해 있고(12:16), 강도의 손을 넉넉하게 채웠다가도 그의 손에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것 또한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다(12:6). 나라를 강하게 하는 이도 그분이며 다시 멸하게 하시는 이도 그분이다(12:23). 왕들과 귀인들과 지혜자를 비천한데 던지는 이도 그분이다. 모든 생물과 사람의 목숨이 그의 손에 있어 그가 그 모두를 주관한다(12:10).


이 모든 일들을 오직 의인은 잘되고 악인은 망한다는 하나의 논리로 담기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너무도 크고, 우리 앞에 마주치는 현실은 당혹스러울 만큼 다양하다. 욥의 친구들은 ‘그러니 너는 빨리 항복하고, 죄를 인정하고, 긍휼을 구하며, 현실을 단순한 하나의 원리 위에 올려 놓으라’고 말하지만, 욥은 당장 그 자신이 당하고 있는 재난에서부터 자연과 현실에서 겪게 되는 일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행하심을 권선징악으로 다 담아낼 수 없다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욥은 양쪽 다를 붙잡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마주하려 한다. 하나님의 통치와 전능을 포기하지도 않으며, 마주치는 현실의 재앙과 고통을 한두 관점으로 다 덮어 아무 해도 없는 것으로 만들고는 그것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소발의 말처럼 하나님은 오묘하고, 인간은 어리석다 할 것이나, 그것은 인간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의 오묘하심 때문이다. 그래서 물음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더욱 그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져 고통의 현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있는 친구들이 아니라, 고통의 오늘, 하나님께 호소하고 따져 물어가는 욥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우니' 말이다(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