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분노하는 자, 내어주는 자, 넘겨주는 자 (26:1-16)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를 잡아 죽일 흉계를 꾸민다(3,4).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그들의 마음엔 분노가 가득하다(cf.21:15). 그런데 분노는 그들에게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여인을 본 제자들의 마음에도 가득하다(8). 이들은 왜 분노하는 것일까?

 

분노의 이유는 복잡할 수 있지만 분노하는 자가 스스로 확인하는 분노의 명분은 꽤 분명하다. 이 비싼 향유를 낭비하기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며 제자들은 분노한다(9). 그들에게 향유 한 옥합 정도의 돈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 돈을 가난한 자를 위해 사용하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누군가의 행동에 얼마든지 분노하며 그 분노에 명분을 붙여 가지는 것만으로 그 명분을 이루는 자로 산다는 듯 착각을 한다.

 

사람들은 명분을 위해서 분노할 수도 있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면 그들은 다른 이들에 대한 또 다른 분노를 터뜨리는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빠져나가곤 한다. 자신은 정작 은 삼십을 받고 예수를 넘겨주면서도(15), 향유 한 옥합에 해당되는 거금을 가난한 자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며 여인을 비난한다.

 

추상적인 '가난한 자들'을 위해 분개하면서도, 정작 자기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살피지 못하고, 그로 인해 자기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며, 그의 행위를 어리석은 낭비로 평가하는 것으로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10).


그 속에서, 예수와 여인 그 두 사람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준다(2,12).

 

추상적인 인류가 아닌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와(2) 그 예수의 죽음을 내다보며 자기의 생명 같은 옥합을 아낌없이 붓고 있는 이름 없는 한 여인(7,12) – 누구에 대한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누군가를 넘겨 줌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나를 내어줌으로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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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장 – 네가 말하였다 (마 26:17-30)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21) – “주님, 나는 아니지요?”(22). 그러나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자가 나를 넘겨줄 것이다.”(23) “인자는 자기에 대해 기록된 대로 간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인자가 넘겨지는 저 사람에겐 화가 있다. 저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에게 좋았을 것이다”(24). 그를 넘겨 주는 자, 유다가 대답하여 말했다.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 “네가 말하였다”(25).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는 빌라도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너다”(27:11)라고 답하듯, “나는 아니지요?” 묻는 유다에게 예수는 “그렇게 말한 것은 너다”(25)라고 답한다. 이 말은 “네 말이 옳다”거나 “네 말대로다”라는 단순한 긍정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너다”라고 하여, 그 말에 대한 긍정 또는 부정이 예수 자신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묻고 있는 빌라도와 유다에게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 이미 예수를 ‘넘겨주기로’ 대제사장들과 이야기를 맞추고 은 삼십까지 받아왔던 유다가(15) “선생님, 제가 당신을 넘겨주는 사람은 아니겠지요?”라고 묻고 있다. 그에 대해 예수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고 답한다. 넘겨준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를 넘겨주겠다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너 자신이지 않느냐?”라는 말인가? 아니면 ‘제가 넘겨주지는 않겠지요?’라는 유다의 말을 반복하여 “나를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은 너 자신이다”라는 말인가? 예수의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듣는지는 유다의 몫이다.


유월절 식사가 이루어진 곳이 누구의 집인지 마태의 본문엔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안 ‘아무개’에게 가서 유월절을 지키겠다 말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18). 유월절 기간 예루살렘에 있는 집들은 외부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장소를 제공해야 했다. 그런데 성안의 ‘아무개’는 예수의 제자들을 만나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준다. 그곳은 아마도 ‘마가의 다락방’ 이었겠지만, 그 집은 그저 ‘아무개의 집’으로 불려진다.


인자는 그에 대해 기록된 대로 간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그로 인해 인자가 넘겨 지는 사람'은 ‘유다’가 아닌 다만 ‘저 사람’이다(24). 그는 마치 유월절 식사를 위한 장소를 제공해줄 ‘아무개’와 같이 이름 없는 ‘누군가’이다. 예수와 그 제자들을 받아들인 자가 ‘마가의 집’이어야 할 이유가 없듯, 인자를 넘겨줄 그 사람이 ‘유다’여야 할 이유도 없다.


“선생님, 저는 아니겠지요?” – “네가 말하였다.” 예수의 이 말을, "나를 넘겨주겠다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너 자신이지 않느냐?"로 듣든, 아니면 “나를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은 너 자신이다”로 듣든, 그 말을 알아듣고 그 말에 답할 사람은 '저 사람'이 아닌 '유다'이다.


“네가 말하였다”고 말한 후 예수는 식사 중에 말한다. “너희 ‘모두’가 이것을 마셔라. 왜냐하면 이것은 죄를 용서하기 위해 ‘많은 이들’을 위하여 쏟는 나의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다”(27-28). 예수의 그 말씀이 '유다'를 돌려 세우길, 또한 나를 돌려 세우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