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복을 받은 사람 (25:1-46)

 

마지막 때에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2), 착하고 충성된 자와 악하고 게으른 자(26), 복 받은 의인과 저주 받은 그들이(34,41,46) 나뉠 것이다. 각각의 비유는 무엇이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지를 그림처럼 보여준다.


1. 소위 열 처녀 비유는 준비성이 있느냐 없느냐, 부지런하냐 게으르냐가 구분의 기준이 아니라 지혜로우냐 어리석으냐가 기준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등불뿐 아니라 기름까지 준비했고(4), 어리석은 자는 등불만을 준비했다(4). 지혜로운 자들은 불을 내는 것이 등이 아니라 기름임을 알고 있었고, 어리석은 자들은 불을 내는 것이 등이라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안에 생명이 있어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생각하나, 지혜로운 자는 자기 안의 생명의 불꽃은 공급하시는 분이 있기에 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간다. 타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같이 지혜로운 자는 자기를 불태워 불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입어 오늘을 산다.


2. 달란트 비유는 능력이나 결과가 아닌 충성을 기준으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함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나눠진다. 충성, 곧 주인의 종으로 살았는가?가 기준이다. 두 명의 종은 주인에게 거액의 돈을 받은 즉시 장사를 하여 남긴 것을 주인에게 내어 놓는다, 그들은 주인의 것으로 장사하는 주인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한다. 다른 한 종은 주인에게 거액의 돈을 받고 그것을 바로 땅에 묻는다. 그는 주인이 오기까지 주인과는 상관없는 자로 살아간다. 주인의 것으로 살지도 않았고 주인에게 손해도 끼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못한다.


3. 영생과 영벌로 갈라지는 심판은 ‘여기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중의 하나’를 어떻게 대하고 살았느냐에 따라 이뤄진다(40,45). 임금은 자기 앞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자기의 형제라 부른다. 그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앞에 있는 모든 자들이 지극히 작은 자들이다. 그런 자들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임금의 형제이다. 그 형제들을 먹이고, 입히고, 영접하고, 돌보고, 책임지는 구체적인 사랑이 심판의 기준이다. 명분 있는 일이나, 얼굴 없는 다수의 무리가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오늘 나의 몸으로 만나 관계하는 사람들, 그 지극히 작은 사람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돌아보고 찾아가는 사랑, 그 사랑이 기준이다.


사랑의 위대함은 목숨을 내어주는 지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구체적인 대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사랑은 사랑 자체를 사랑하거나,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거나, 사랑 받는 나를 사랑하거나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함께 살아가는 곁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라는 추상적인 단위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사랑한다. 죽음도 생명도 하늘의 것도 땅의 것도 이 사랑을 중단시킬 수 없는 것은 그는 다만 사랑이라는 행위를 사랑하거나 사랑이라는 가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살과 피를 가지고 오늘 40대 초반을 넘어 살아가는 인간인 나, 그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나, 이 작은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나를, 그는 자신의 형제라, 아들이라, 부르며, 감옥에까지 따라와 돌보신다. 인류가 아닌 한 사람,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이다(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