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기도회 () - 마가복음 14 32-52

 

고난주간을 맞아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금식하고 절제하며, 주의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곤 합니다.

 

고난주간, 물론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고통 앞에 서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에 두려움과 떨림을 줍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우리의 죄인 됨이며,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의 크기와 깊이 입니다.

 

그가 당한 고통은 나의 죄악 때문이며

그의 상한 육체와 영혼은 우리의 비열함과 더러움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반드시 마주쳐야 하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연약함, 비열함과 더러움, 우리의 죄의 깊이 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를 찾아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뜻으로 자기 마음을 채우고, 약해질 수 있는 마음을 붙잡아 세우며

눈물과 땀으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말씀하실 때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은 단 한 순간도 고통하는 그의 마음 곁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3년을 동거하며 따랐던 스승과의 마지막 밤,

그를 위하여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밤에

저들은 피곤한 자기의 육신을 이기지 못하고,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그의 마음 곁에서 잠이 들어 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말만으론 다 감쌀 수 없는 어리석음! 이에 대해 제자들은 이후 스스로 분노했을까요?

 

예루살렘을 뒤흔들며 입성하신 선생님 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에 잡혀 있는 그들에게

‚심히 고민하며 죽게 되었다‘는 그의 영혼의 소리는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을 듣고,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며,

말하고 싶어 하는 것 만을 말할 뿐,

도대체 누군가의 죽을 것 같은 마음엔 관심이 없습니다.

죽을 것 같은 누군가의 마음 곁을 단 한 시간이라도 깨어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무도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아무도 내 곁에 있어 주지 않는다고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누군가를 정죄합니다.

 

 

가롯 유다.

예수를 판자, 배반자, 도둑, 자살한 사람, 나지 않았으면 자기에게 더 좋았을 자….

수많은 얘기들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정확히 바로 나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랑과 존경의 입맞춤이어야 할 그것으로 한 사람을 팔아 넘길 때,

그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합니다.

 

어떤 말들로 변명을 늘어 놓는다 해도

유다 그는 지금 ‚예수를 위하는 자‘로 거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욕망과 자기 감정, 자기 분노와 자기 생각에 붙잡혀 있습니다.

 

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메시야에 대한 자기의 기대를 배신하고 있다는 선생님에 대한 실망감이든,

그에게 배반 당했다는 분노의 마음이든,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총애하시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든,

그 어떤 것이 이유와 동기라 할지라도

 

그는 지금 미리 말을 섞은 한 무리들과 작당을 하여

한 사람을 밀어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선생님 기뻐하십시오‘라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법한 인사말과 더욱 다정한 입맞춤으로

누군가를 누군가의 손에 팔아 넘기고 있는 가롯유다의 어색한 웃음에서

거짓 인사와 거짓 웃음을 날리며

누군가를 농담 같이 가벼운 말로 함께 밀어 떨어뜨리는 우리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우리 사이에서, 서로를 구분하고

죄가 있는 것은 너고, 나와 우리는 죄가 없다는 생각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말을 하고 있다면 그 때

우리는 유다 편에 서는 것입니다.

 

나와 우리는 죄가 없고 너와 너희들에게 죄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왼손은 죄가 없는데 오른 손에만 죄가 있고, 왼쪽 귀는 죄가 없는데 오른쪽 귀만 죄가 있다는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는 어떤 개인, 한 사람, 누군가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입니다.

죄는 한 사람, 개인 속에 있지 않고, 우리 모두 속에 있습니다.

세상에 ‚저 사람의 죄‘는 없습니다. 있다면 ‚우리의 죄‘가 있을 뿐입니다.

 

죄가 ‚우리의 죄‘가 아닌 ‚너의 죄‘로 우리 입에 올려질 때,

그 때 우리는 한 사람 예수를 잘라내고 밀어 떨어뜨림으로 ‚자기들‘은 살고자 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자리에 서게 되며, 거짓 인사와 거짓 입맞춤을 날리는 유다의 편에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서 몸의 한 부분이 아프면 온몸이 같이 아프고

몸의 한 부분이 문둥병이나 간질병이 있으면 온몸이 문둥병 환자요 간질병 환자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를 지고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닌, ‚우리의 죄‘ 때문에 자신을 죽음에 넘겨 주십니다.

 

 

벌거벗은 몸에 얇은 천 하나만 두르고 예수를 따르다가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친 한 청년에 대한 기록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당혹스럽습니다.

그러나 마가만이 전해주는 이 청년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마가 자신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마가가 왜 잠옷 바람에 예수를 따라 나섰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를 버리고 벌거벗을 모습으로 도망하는 자기의 모습을 마가는 굳이 이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몸으로 도망하고 있는 그에게 어쩌면 더욱 부끄러웠던 것은

자기가 벗었다는 사실보다, 자기가 살고자,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 부끄러움을 마가가 이곳에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를 버려두고 도망한 것은 저들의 죄가 아니라, 자기의 죄이고, 우리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벌거벗고 도망하는 우리….

 

그런 우리를 덮어주기 위해 죽으신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저들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를 생각하게 되고,

홑 이불 하나로 겨우 가린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

* 표 안의 문장(*....*)은 대천덕 신부님의 <절기설교>에서 인용한 문장임.